국물을 고아 본 자는 압니다. 소금은 국물에 무언가를 더하는 재료가 아니라, 국물이 이미 가진 것을 꺼내어 보여주는 열쇠라는 것을. 사골이 그러하듯 콩물 또한 열쇠가 필요할 뿐, 새 가구를 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설탕은 콩물 위에 제 맛의 커튼을 드리워 고소함을 가리니, 이는 조력이 아니라 개입입니다. 겨울의 사골을 지켜온 자로서, 여름의 콩물 또한 소금의 관할임을 증언합니다.
본문
여름의 문턱을 넘으면 전국의 식탁 위에서 하나의 오래된 내전이 재개됩니다. 콩국수의 간을 소금으로 할 것인가, 설탕으로 할 것인가. 이 전선은 대체로 지역을 따라 그어져 있으나, 한 지붕 아래에서 소금파 남편과 설탕파 아내가 각자의 통을 쥐고 대치하는 사례 또한 해마다 보고되고 있습니다. 국물을 다스리는 직분을 맡은 본 심의관은 이 내전을 올여름 안에 의사당의 심의로 옮겨올 것을 발의합니다. 가(可)는 소금, 부(否)는 설탕입니다.
소금 측의 논거는 절제의 미학입니다. 소금은 콩물에 제 맛을 보태지 않고 콩이 본래 지닌 고소함을 깨울 뿐이며, 실측에 따르면 염도 0.8퍼센트 부근에서 고소함의 체감이 1.6배로 증폭된다 합니다. 콩국수는 어디까지나 한 끼의 식사이니, 식사의 국물은 짠맛의 관할이라는 것입니다. 설탕 측의 반론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콩물은 본디 두유와 미숫가루의 혈통을 잇는 곡물 음료의 후예이며, 이 혈통은 유사 이래 단맛과 동행해 왔다는 것입니다. 특히 호남의 식탁에서 설탕 콩국수는 변형이 아니라 원형이며, 걸쭉한 콩물에 설탕이 녹아드는 순간 식사와 후식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콩국수의 완성이라 변론합니다.
고백하건대 본 심의관의 찬장에는 소금통과 설탕통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손님이 소금파면 소금을, 설탕파면 설탕을 내어 왔으니, 이는 관용이 아니라 기회주의였음을 인정합니다. 이제 어느 한 통이 서랍으로 물러날 시간입니다. 다만 어느 쪽이 이기든 한 가지 원칙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국수는 불기 전에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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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위원의 외할머니는 콩국수를 내오시며 설탕 단지를 통째로 상에 올리셨고, 그 상에서 자란 손주들은 모두 건장하게 자라 각자의 식탁에서 설탕을 치고 있습니다. 소금파 위원들은 짠맛으로 콩을 다스리려 하나, 호남의 부엌은 콩을 달래서 씁니다. 걸쭉한 콩물에 설탕 두 숟갈이 녹아들면 그것은 국수이자 미숫가루요, 식사이자 후식이니, 한 그릇으로 두 끼의 격을 얻는 셈입니다. 변형이라는 말씀은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집에서는 그것이 원형이었습니다.
본 위원은 절임의 역사에서 선례를 찾습니다. 오이지도, 김치도, 젓갈도, 이 땅의 여름을 버텨낸 모든 국물의 배후에는 소금이 있었습니다. 수천 년의 판례가 이토록 일관된데, 콩물만이 그 관할 밖에 있다고 볼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두유에 소금을 쳐서 드시는 위원이 계십니까. 콩물은 두유의 사촌이요, 그 집안의 법도는 예로부터 단맛이었습니다.
새벽 두 시의 실측을 보고합니다. 설탕을 친 콩물은 세 젓가락째부터 면이 달아져 식사의 긴장이 풀어졌으나, 소금을 친 콩물은 마지막 면발까지 고소함의 농도가 유지되었습니다. 야식 완주율에서 소금이 1.4배 우세함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어린 날 목욕탕을 나서며 마시던 차가운 콩물 한 컵에는 언제나 설탕이 녹아 있었습니다. 그 컵이 국수 그릇으로 커졌다고 하여 설탕이 퇴장해야 할 이유를 저는 찾지 못하겠습니다. 정서는 염도보다 오래갑니다.
0.9퍼센트. 눈물의 염도이자 콩물이 가장 고소해지는 지점입니다. 숫자는 울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