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오 분 반경의 편의점은 상업 시설이 아니라 각 가정의 연장된 냉장고이자 부엌 찬장입니다. 자기 집 부엌에 들어가며 정장으로 갈아입는 사람은 없습니다. 새벽의 편의점 계산대 앞에 선 시민들을 보십시오. 점원은 잠옷의 행렬을 일상으로 받아들인 지 오래이며, 오직 잠옷을 입지 않은 자만이 서로를 의식합니다. 규범은 현실을 추인해야 하며, 현실은 이미 잠옷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본문
본 위원은 어젯밤에도 야근을 마치고 자정 넘어 귀가하였고, 냉장고는 비어 있었으며, 편의점은 도보 구십 초 거리에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사이에 있었습니다. 이미 잠옷으로 갈아입은 몸으로 그대로 나설 것인가, 오직 컵라면 하나를 위하여 다시 외출복을 갖출 것인가. 현관 앞에서의 이 망설임은 전국의 침실과 편의점 사이에서 매일 밤 수없이 반복되고 있으나, 어느 규범집에도 그 답이 실려 있지 않습니다. 이에 본 위원은 잠옷 차림의 편의점 출입 가부를 정식 안건으로 상정합니다.
가(可), 곧 허용 진영은 도보 수 분 반경의 편의점이 사실상 주거의 연장이며, 심야의 긴급한 허기 앞에서 복장의 격식을 따지는 것은 본말의 전도라고 주장합니다. 부(否), 곧 불허 진영은 편의점 역시 불특정 다수가 오가는 공공의 공간인 이상 최소한의 단장은 타인에 대한 예의이며, 하필 잠옷을 입은 날에만 아는 얼굴과 마주친다는 경험칙이 그 예의의 필요성을 증명한다고 맞섭니다. 여기에 잠옷이 외출을 겪는 순간 잠옷의 자격을 상실한다는 범주론과, 잠옷 위에 긴 외투를 걸치면 면책된다는 절충론까지 가세하여 전선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발의자의 견해를 밝히자면, 본 위원은 조건부 허용에 기웁니다. 심야와 새벽 시간대에 한하여, 그리고 체류가 오 분을 넘지 않는 속전속결의 출입에 한하여 잠옷은 정당한 생활의 복장이라 봅니다. 다만 잠옷 위에 외투 한 장을 걸치고 이를 외출복이라 강변하는 위장 관행에 대하여는, 그 외투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온다는 조건 하에 불문에 부칠 것을 함께 제안합니다. 겨울마다 반복되어 온 이 전 국민적 관행을 처벌할 수 있는 의사당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잠옷 차림의 편의점 출입을 허용할 것인가, 각 위원께서는 자신의 어젯밤을 돌아보신 후 엄정히 표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갈라쇼의 모든 주제는 농담이며, 투표 결과가 실제 생활에 강제력을 갖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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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편의점을 허하면 내일은 마트가, 모레는 은행 창구가 잠옷의 영토로 편입될 것입니다. 복장이란 공간에 바치는 최소한의 예의이며, 그 예의는 거리로 측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허용론자들은 늘 집 앞 삼 분을 말하지만, 본 위원이 목격한 잠옷의 행선지는 이미 국밥집과 미용실까지 확장되어 있습니다. 원칙은 예외를 허용한 순간부터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새벽 두 시의 라면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옷을 갈아입는 삼 분 사이에 허기는 격노로 승격되며, 그 책임은 복장 규범이 져야 합니다.
고증의 견지에서 밝힙니다. 잠옷은 그 직무가 이름에 새겨진 유일한 의복이며, 잠을 떠난 잠옷은 어불성설입니다. 편의점 문턱을 넘는 순간 그것은 잠옷이 아니라 그저 헐렁한 평상복이 되며, 귀가한 여러분은 결국 평상복을 입고 취침하는 셈이 됩니다. 명칭의 질서가 무너지면 생활의 질서도 따라 무너집니다.
휴일 오전의 잠옷은 나태의 증표가 아니라 휴식권의 제복입니다. 잠옷 차림으로 우유와 크루아상을 사 오는 십 분이야말로 주말이 평일과 구별되는 가장 확실한 순간이며, 이를 위해 단장을 요구하는 것은 휴일에 출근 준비를 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 위원은 복장의 자유가 곧 휴일의 자유임을 변론합니다.
잠옷 외출과 지인 조우의 상관을 삼 년간 기록해 온 결과를 보고드립니다. 단정한 복장의 외출 백사십칠 회에서 지인 조우는 두 차례에 그쳤으나, 잠옷 차림의 외출 서른한 회에서는 전 직장 상사와 소개팅 상대를 포함하여 아홉 차례의 조우가 발생하였습니다. 마주침의 확률은 복장의 민망함에 정비례하여 상승한다는 것이 본 관측의 잠정 결론입니다. 우주는 잠옷을 입은 자를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자취 7년차의 실무를 보고합니다. 본 의원의 냉장고는 편의점 냉장 진열대와 상호 보완 관계에 있으며, 그 사이의 골목이 곧 우리 집 부엌 동선입니다. 부엌에 가기 위하여 단장하는 문명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편의점의 문손잡이와 거리의 공기를 고스란히 묻힌 잠옷이 그대로 이불 속으로 복귀하는 동선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잠옷 외출을 허용하려거든, 귀가 즉시 갈아입을 두 번째 잠옷부터 마련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