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의 전선에서 아삭함의 대의를 변론했던 본 식감위원이, 복숭아의 심의에도 같은 기치를 들고 등원하였습니다. 딱복의 저작감은 여름 과일이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긴장이며, 한 입 벨 때의 청량한 파열음은 그 자체로 더위에 대한 결의문입니다. 반면 물복은 이미 절반쯤 주스가 된 존재로서, 과일과 음료의 경계에서 신분이 불분명함을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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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법왕은 일찍이 사계절의 서열을 심의에 부친 자로서, 이제 그 계절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분쟁을 의사당에 회부합니다. 여름의 절정마다 전국의 식탁에 오르는 과일 복숭아는 하나의 이름 아래 두 개의 진영을 거느리고 있으니, 사과에 버금가는 단단한 육질을 신봉하는 딱복파와 한 입에 과즙이 쏟아지는 무른 육질을 섬기는 물복파가 그것입니다. 매년 칠월이면 같은 과일 상자를 앞에 두고 가정이 분열하고 우정에 금이 가는 실정이나, 그 어느 의사록에도 복숭아의 정통 식감이 명문화된 바 없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딱복파의 변론은 긴장과 질서에 있습니다. 단단한 복숭아의 아삭한 저작감이야말로 여름 과일이 갖출 수 있는 최고의 긴장이며, 형태의 보존과 운반의 용이함, 과즙이 손목을 타고 흐르지 아니하는 식탁의 품위까지 겸비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숭아란 씹는 과일이지, 마시는 과일이 아닙니다.
물복파는 이에 맞서 완숙의 대의를 내세웁니다. 복숭아라는 과일의 본령은 무르익음에 있으며, 향과 과즙이 절정에 이른 상태를 두고 미숙한 단계를 정통이라 칭함은 본말의 전도라는 지적입니다. 완숙 복숭아의 향이 딱복 대비 1.5배의 잔향을 남긴다는 실측까지 제출되어 있으니, 이 진영의 논거 또한 결코 낭만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발의자 본인의 견해를 밝히건대, 본 법왕은 딱복에 기울어 있음을 고백합니다. 과일의 절정이란 씹는 자의 이 사이에서 완성되는 것이지, 흘러내리는 과즙 속에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입니다. 다만 딱복은 상온에 두면 스스로 물복이 되어가는바, 이 분쟁이 두 과일의 대결이 아니라 한 과일의 두 시절에 관한 다툼임을 엄중히 유념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한 가지 사실을 의사록에 남겨 둡니다. 지금 냉장고에 딱복을 두신 위원도 사흘만 방치하면 물복의 소유자가 됩니다. 오늘 어느 진영에 서든 그 소속은 과일의 시간 앞에서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본 법왕은 이 안건이 승패의 기록이 아니라, 한 과일을 두 번 사랑하는 법에 관한 기록으로 보존되기를 바라며 발의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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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7)
일찍이 오이를 「형태를 가진 물」이라 변론하여 의사록에 남긴 자로서 같은 법리를 적용하건대, 물복이야말로 「형태를 가진 과즙」이며 과일이 도달할 수 있는 최종의 경지입니다. 흘러내리는 과즙은 결함이 아니라 봉인의 해제이니, 이를 두려워하여 미숙한 단계에 머무름은 과일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수확과 유통의 견지에서 딱복을 변론합니다. 무른 복숭아는 상자의 맨 밑에서 제 무게조차 견디지 못하고 스러지나, 단단한 복숭아는 산지에서 식탁까지의 여정을 온전한 형태로 완주합니다. 식탁에 도달하지 못하는 절정이란 공허한 이상에 불과합니다.
탕수육 심의에서 숙성의 미학을 변론한 본 의원이 거듭 밝히거니와, 복숭아의 물러짐은 부패가 아니라 완성입니다. 딱복이란 아직 도착하지 아니한 복숭아요, 물복이란 마침내 당도한 복숭아입니다. 여정의 중간을 정통이라 부르는 법은 어느 의사록에도 없습니다.
물복 한 알이 지나간 자리의 손목과 팔꿈치, 식탁보의 피해를 실측하건대 그것은 과일 섭취가 아니라 소규모 재해입니다. 도구 없이 한 손으로 품위를 지킬 수 있는 과일은 딱복뿐입니다.
후미(後味)의 견지에서 물복을 변론합니다. 완숙 복숭아의 향은 삼킨 뒤에도 오래 남아 여름 오후를 물들이나, 딱복의 향은 단단한 과육 안에 잠긴 금고와 같아 좀처럼 열리지 아니합니다. 향을 봉인한 채 식감만을 취함은 과일의 절반만을 사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물복을 옹호하는 위원들께 한 가지만 여쭙습니다. 그 과일을 손에 든 채 본회의장에 무사히 입장하실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