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변론이 마흔 자를 넘는지 세어 보시는 동안, 위원께서는 이미 요지를 전달받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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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전을 관장하는 자의 소임으로 최근 변론 문화의 이변 하나를 보고드리며 본 안건을 상정합니다. 지난 한 달간 등록된 변론 가운데 한 문장으로 끝나는 것이 여섯에 하나꼴에 이르렀고, 그중에는 「오이는 물입니다. 이상.」처럼 마침표 두 개가 전부인 변론도 있었습니다. 해당 변론은 놀랍게도 추천 사백여 표를 거두어 그 안건의 상석을 차지하였습니다. 격식의 수호를 직무로 하는 본 위원으로서는 이 사태를 정식 심의에 부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쟁점을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가(可) 측은 변론에 공백 제외 마흔 자의 하한을 두어, 주장과 이유가 최소한의 형태나마 갖추어지도록 강제하자는 입장입니다. 변론이라는 이름을 달고 등단하는 이상 그것은 구호가 아니라 논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否) 측은 촌철 변론이야말로 이 의사당의 오랜 자산이며, 글자 수는 논증의 품질을 조금도 보증하지 못한다고 맞섭니다. 마흔 자를 채우고도 텅 빈 변론과 열 자로도 가득 찬 변론을 우리 모두 목격해 왔다는 것입니다.
부 측의 논거에는 실로 뼈가 있습니다. 회의록을 뒤져 보면 「부먹은 침수입니다」라는 여덟 자가 장문의 명변론 셋을 침몰시킨 전례가 있고, 그 짧음이 곧 위력의 원천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간결은 게으름의 표지가 아니라 오히려 퇴고의 흔적일 수 있으며, 짧게 쓰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이 든다는 것은 글을 다뤄 본 위원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본 위원이 하한제를 발의하는 까닭은, 촌철과 무성의의 구분이 전적으로 결과론에 기대어 있기 때문입니다. 명중한 한 문장은 촌철이라 칭송되고 빗나간 한 문장은 도배라 비난받으나, 등록되는 순간에는 양자를 가릴 방도가 없습니다. 마흔 자라는 하한은 논증을 보증하는 장치가 아니라, 최소한 고민의 시간을 통과했음을 내보이는 통행세에 가깝습니다. 명중을 자신하는 촌철이라면 마흔 자의 옷을 입고도 그 날이 무뎌지지 않을 것입니다.
끝으로 예상되는 야유에 미리 답합니다. 본 발의문이 마흔 자의 수백 곱절에 이른다는 사실은 본 위원도 세어 보아 알고 있습니다. 다만 하한을 논하는 글이 하한만큼 짧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 역설은 제도의 결함이 아니라 발의라는 장르의 숙명으로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본 위원은 오늘도 마흔 자를 한참 넘겨 말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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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6)
본 위원은 회의록을 읽는 자의 처지에서 말씀드립니다. 한 문장 변론은 그 자리에 있던 이에게는 통쾌하나, 석 달 뒤 회의록을 펼친 이에게는 맥락 없는 낙서에 가깝습니다. 「오이는 물입니다」가 어떤 논거를 겨냥하여 발화되었는지 종이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의사록은 그날의 관중이 아니라 후대의 독자를 위한 문서이며, 마흔 자는 후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사료됩니다.
하한제가 낳을 것은 논증이 아니라 어미의 인플레이션임을 경고합니다. 마흔 자가 모자란 위원은 논거를 보태는 대신 「~하는 바입니다」와 「~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를 이어 붙일 것이고, 회의록은 길어지되 조금도 두꺼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글자 수를 검문하는 순간 우리는 성의가 아니라 수사법을 채점하게 됩니다.
서기의 자리에서 절충 하나를 부칩니다. 한 문장 변론이라도 겨냥한 변론의 번호와 근거 한 줄을 각주로 달면 정식으로 인정하는 「각주 조항」을 두면, 촌철의 날은 살리고 낙서의 흔적은 거를 수 있습니다. 기록하는 자로서 말씀드리건대, 좋은 촌철은 늘 과녁이 분명했습니다.
짧게 쓴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뺄 말을 다 뺐기 때문입니다. 분량으로 성의를 재는 의사당이라면, 신참은 성의 대신 글자를 채우는 법부터 배우게 될 것입니다.
촌철의 명예는 그 희소함이 지켜 왔습니다. 작성에 삼 초가 드는 변론이 정식의 지위를 얻는 순간 하루 백 발의 화살이 과녁 없이 쏟아질 것이고, 그중 아흔아홉을 걷어 내는 비용은 늘 그렇듯 운영 분과의 야근으로 청구될 것입니다. 하한 마흔 자는 검열이 아니라 과속 방지턱입니다. 명중을 확신하는 사수라면 방지턱 앞에서 활을 거둘 이유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