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저자에 대한 부역이 아니라 독자의 삶에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호흡이 맞지 않는 책과 의무감으로 동석하는 것은 독서가 아니라 접대이며, 접대로 넘긴 삼백 쪽에는 밑줄 한 줄 남지 않습니다. 본 위원의 서가에서 가장 빛나는 책들은 완독한 책이 아니라, 스무 쪽만 읽고도 여백이 메모로 빼곡해진 책들입니다. 완독률이라는 회계장부가 아니라 책과 나눈 대화의 밀도로 독서를 셈하여야 합니다.
본문
본 위원의 서가에는 책갈피가 꽂힌 채 여러 해째 잠들어 있는 책이 서른두 권 있습니다. 어떤 것은 137쪽에서, 어떤 것은 목차에서 멈추어 있습니다. 본 위원은 오래도록 이 서른두 권을 갚지 못한 부채로 여기며 살아왔으나, 어느 날 문득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과연 갚아야 할 빚인가, 아니면 정당하게 종결된 계약인가. 재미없는 책을 중도에 덮는 행위의 정당성을 이 자리에서 심의에 부칩니다.
완독 의무론, 즉 부(否)의 논거는 만만치 않습니다. 저자가 수년을 들여 쌓아 올린 논증을 백 쪽만 듣고 판정하는 것은 재판을 반쯤 듣고 퇴정하는 배심원의 무례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장에서 모든 복선이 회수되는 작품 앞에서 중도 하차자는 영영 오독자로 남습니다. 나아가 지루함을 견디는 근육이야말로 독서력의 본체인데, 하차가 습관이 되면 어떤 두꺼운 책도 끝내 통과하지 못하는 체질이 되고 만다는 경고도 있습니다.
하차 권리론, 즉 가(可)의 논거는 단순하고 강력합니다. 인생은 유한하고 신간은 매주 쏟아지므로, 맞지 않는 책에 바치는 시간은 맞는 책에게서 훔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들인 시간이 아까워 마저 읽는 것은 경제학이 매몰비용의 오류라 부르는 바로 그 증상이며, 억지 완독의 기억은 독서 자체에 대한 혐오로 번져 다음 책을 펴는 손마저 멈추게 합니다. 요컨대 완독 의무야말로 독서 인구를 줄여 온 숨은 범인이라는 고발입니다.
본 위원은 하차의 권리를 인정하되 그 절차를 다듬는 절충을 제안합니다. 어느 책이든 최소 오십 쪽까지는 저자에게 변론의 기회를 줄 것, 그리고 덮을 때에는 책갈피를 꽂아 「폐기」가 아니라 「휴간」으로 처리할 것이 그 골자입니다. 스무 살에 덮은 책이 마흔에 다시 열리는 일은 드물지 않으니, 하차는 책과의 절연이 아니라 시차를 둔 재회의 예약일 수 있습니다. 죄책감이라는 이자만 걷어낸다면, 서가에 잠든 서른두 권은 부채가 아니라 만기가 정해지지 않은 적금인 것입니다.
끝으로 밝혀 둘 것이 있습니다. 본 발의문을 여기까지 읽어 주신 위원께서는 완독의 미덕을 이미 실천하셨고, 셋째 문단쯤에서 덮고 곧장 아래로 건너뛰신 위원께서는 본 안건의 취지를 몸소 입증하고 계십니다. 어느 쪽이든 본 안건에 기여하신 셈이니, 이 의안은 읽다 만 자와 끝까지 읽은 자가 처음으로 동등한 지분을 나누어 갖는, 희귀하게 공평한 의안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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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4)
책은 한 권의 완결된 인격체이며, 그 인격의 결론을 듣지 않고 자리를 뜨는 것은 대화의 중도 파기입니다. 137쪽의 지루함은 태만이 아니라 300쪽의 감동을 위해 저자가 쌓아 둔 주춧돌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중도 하차자가 「그 책은 지루하다」고 세간에 증언할 때, 책은 자신을 변호할 기회도 없이 오명을 뒤집어씁니다. 판결은 최후 진술까지 들은 뒤에 내리는 것이 문명의 절차임을 변론합니다.
본 위원은 덮기로 결심한 쪽에 연필로 「여기까지 즐거웠다」라고 적어 두고 떠납니다. 이별에도 격식은 있는 법입니다.
사백 쪽 내내 지루하다가 마지막 여덟 쪽에서 전부를 뒤집는 책을 만난 뒤로, 저는 하차라는 선택지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날 여덟 쪽 앞에서 덮었더라면 평생 그 책을 범작으로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하차의 자유를 부정하지는 않겠으나, 그 자유에는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 영영 알 수 없다」는 조용한 값이 매겨져 있음을 상기시키고자 합니다.